망막이야기

이성진의 망막이야기 2 -29

작성일 2009-09-01 첨부파일



눈물의 발자국 (trail of tears)

유럽인들이 발견한 신대륙에는 이미 훌륭한 사회와 문화를 이루던 아메리카 인디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래 전 당시 육지였던 지금의 베링해협을 통해 시베리아에서 알라스카로 건너왔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2,000개 부족에 1,500만 명 이상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마야족, 아즈텍족, 인카족은 더 남쪽으로 내려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유럽의 이주민이 인디언을 만난 것은 1607년 영국인들이 제임스타운(jamestown)에 캠프를 세운 후였습니다. 이주민의 지도자 존 스미스(john smith) 대위가 인디언들에게 붙잡혔을 때 11살인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pocahontas)의 간청으로 죽음을 면한 후 인디언들과 잘 어울리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임스타운 이주자들 중 존 롤페(john rolfe)는 17세의 포카혼타스가 이주민과의 전쟁 중 납치되어 왔을 때 그녀와 결혼하여 제임스타운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네덜란드는 1621년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당시 포르투갈이 가지고 있던 노예무역과 사탕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며, 후에 뉴욕으로 개명한 뉴 암스텔담(new amsterdam)을 인디언과의 모피무역 중심지로 건설하였습니다. 1624년 피터 미니트(peter minuit)는 인디언 추장을 만나 도끼, 의류, 양은 그릇, 빤짝이는 구슬 등이 들어 있는 24불 가치의 상자 둘을 건네며 맨하탄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필그림(pilgrim)들은 1629년 12월 16일에 플리모스(plymouth)에 상륙하였는데 그해 겨울 102명의 일행 중 5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봄이 오자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며,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할 수 있었고 이것은 첫 감사절 축제가 되었습니다.

17세기 말 북미 대륙은 담배나 비버의 털 등으로 이곳에 진출한 유럽 강대국들의 쟁탈지역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주로 무역과 선교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은 반면 영국 이주민은 영구히 정착하려고 했으므로 원주민과 목숨을 건 싸움도 불사했습니다.

1689년부터 독립전쟁이 일어나기까지 4번의 큰 ‘프랑스와 인디안 전쟁들(the french and indian wars)’이 북미 대륙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영국이 프랑스와 인디언 연합군에 대항하여 싸운 전쟁이라는 뜻이며, 더 정확하게는 영국이 프랑스, 스페인, 네델란드를 몰아내고 북미대륙을 장악하려는 전쟁이었습니다. 결국 영국이 승리함에 따라 인디언들은 멸종되거나 서쪽이나 오지로 쫓겨났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디언 지도자는 샤우니(shawnee)족 추장인 테쿰세(tecumseh, 그림)입니다. 그는 백인들의 오하이오강 서쪽 진출을 막기 위해 중서부 원주민과 연합체를 구성하여 티페카노(tippecanoe)와 와바쉬(wabash)강에 집결시켰습니다.

미국 정부는 해리슨(henry harrison, 후에 대통령이 됨) 장군에게 1,000명의 군대를 주고 진압하게 했습니다.

해리슨은 1811년 11월 테쿰세가 다른 부족을 방문한 사이에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고, 테쿰세는 남은 인디언들을 데리고 영국군에 합류하여 미국과 싸우다가 1813년 10월 전사함으로 인디안 연방의 꿈은 깨어졌습니다. 이 사건 후 미국인들은 반 영국감정이 심해졌고, 하원 의장 클레이(henry clay)의 주도하에 4대 대통령 매디슨(james medison)은 재선 선거운동 중인 1812년 6월 영국과의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콜럼버스가 산 살바돌(san salvador)에 첫발을 내디딘 후 원주민과 유럽인의 관계는 무기를 앞세운 회유, 배신, 살육으로 얼룩졌습니다. 미국의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은 1814년경 원주민과의 전쟁으로 ‘날카로운 칼’이란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와 후임자 밴 부렌(van buren)은 원주민 강제 이주정책(indian removal act)을 시행하였습니다.

북미의 동남부지역에 살던 쵹토(choctaw), 치카소(chickasaw), 크릭(creek), 체로키(cherokee) 그리고 세미뇰(seminole) 등 5개의 개화된 원주민들은 1831-1833년에 제1차 '이주' 대상이 되었습니다. 수요가 폭등한 담배와 목화 재배에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시시피에서 알칸소 서쪽까지 도보로 이주하는 것은 열악한 의식주 외에도 폐렴과 콜레라로 인한 ‘죽음의 행진’이었습니다.

이주를 거부한 크릭 부족은 1835년 전쟁으로 대항하였으나 결국 14,500명이 붙잡혔고, 그 중 2,500명은 쇠사슬에 묶인 채 오클라호마까지 이송되었습니다. 가장 개화된 체로키 부족은 인디언 독립국가를 세우고 대법원에 법적 소송을 제기하며 저항하였으나 1838년 밴 부렌 대통령 시절에 15,000명 이상이 강제로 이주되었으며, 그 동안 사망하였습니다. 이들은 애트란타에서 테네시와 켄터키를 거쳐 오하이오와 미주리 강을 건너 지금의 오크라호마로 가는 길을 ‘눈물의 발자국(trail of tears)’이라고 부릅니다.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였든 플로리다의 세미놀(seminole) 족은 1,500여명의 미국 군인들이 전사할 정도의 치열한 저항을 하였지만 결국은 강제로 이주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