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막이야기

이성진의 망막이야기 2 -50

작성일 2010-03-16 첨부파일

 
시체 도굴범 쉴렘
 

쉴렘(friedrich s. schlemm, 1795-1858)은 독일 중북부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ieg)의 기터(salzgitter) 출생입니다.
 
당시 이곳은 프랑스령으로 나폴레옹의 형제 제롬(jerome)이 통치하던 베르트팔렌 왕국(kingdom of westphalia)에 속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학교 교장이었는데,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쉴렘은 처음에 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늦게 문법학교에 들어갔지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여 상급학교 진학에 필요한 a 등급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17세에 이발외과의(barber-surgeon) 견습생으로 들어간 그는 간단한 수술과 상처관리를 도왔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브라운슈바이크 해부-외과 학교(anatomico-surgical institute)에서 교육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해부, 외과, 산과를 다루던 이 학교는 1869년까지 유지가 되었으며, 당시 a 등급을 통과하지 못한 이발외과의 견습생들에게 의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는 해부해체에 있어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으므로 담당교수는 그를 해부 조직을 준비하는 유급조수로 사용하여 월 12 탈러(thalers, 4 달러 정도)를 주었습니다.

1890년 발간된 “general german biography"에 보면 쉴렘이 21세에 동료 학생들과 브라운슈바이크 교회 뜰에 묻힌 여성의 시체를 파내어 학교로 가져온 후 ‘친지들의 동의 없이 시체에서 후두를 제거한’ 범죄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19세기 독일에서 해부학 연구를 위해 얻은 시체는 주로 범죄자들과 자살자들에 한하였지만 당시 해부실습을 위한 시체도굴은 유럽 곳곳에서 보고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와 동료들은 체포되었고, 4주간 감옥형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사진) 이 일 후 그는 학교를 사직하였으며, 돈 한 푼 없이 베를린으로 떠났습니다.  
 
베를린에서 돈과 학위 없이 사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간신히 조교 때 보다 못한 월 10탈러를 받고, 낮은 계급으로 치부되던 군의관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프러시아에서 군의관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다양하였고, 수준이 높은 일정을 수행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베를린 대학을 수강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해부해체 솜씨를 발휘할 수 있었으며, 결국 해부학 교실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은 해부학 과장이었던 루돌피 교수(carl asmund rudolphi)로 재능이 있는 학생들에게 사심이 없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덕분에 25세(1820)에 해부학 박물관과 극장의 시체검시관이 되었고, 얼굴 동맥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여 27세에 베를린 대학 의학 학위를 받았습니다. 34세에 객원교수가 되어 월 50 탈러의 강의료를 받았으며, 루돌피 교수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38세)에 정식 해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루돌피 교수의 후임 주임교수에 신청을 했으나 그 자리는 뮐러 교수(johanne muller)가 차지하였습니다.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25년간 따듯한 마음으로 학생을 가르치고, 외과의사를 길러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강의 준비시간 이외에 대부분 역겨운 냄새가 나는 해부실험실에서 2주마다 교체되는 방부 시체들과 함께 연구를 하였습니다.
 
외과의를 위해 특별한 수술과목을 열었으며, 그의 학생 중 한 명이 그 내용을 책으로 편집하였는데, 이것은 3판을 거치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의 방법을 통해 외과의들은 조금씩 더 힘든 수술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활발한 연구로 많은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는 소와 사슴 눈을 통해 각막(검은자)의 신경을 처음 발견하였으며, 그 내용을 35세(1830년)에 arteriarum capitis superficialum icon nova라는 학술지에 보고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피가 차 있는 젊은 남성의 눈을 맨 눈으로 잘 관찰한 결과 쉴렘관(schlemm's canal)이라고 하는 부분을 발견하였는데, 이곳은 눈 속 앞부분에 차 있는 물(방수, aqueous humor)이 눈 바깥의 공막혈관으로 빠져나가는 길입니다. 쉴렘관은 소의 눈에 있는 폰타나 공간(fontana's space)과 혼동되어 존재의 유무에 대한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부르커(ernest von brucke)와 뮐러(heinrich muller)가 쉴렘관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도와주는 섬모근(ciliary muscle)을 기술하면서 논란이 종식되었습니다. 또한 백과사전이나 의학사전, 또는 외과학에 올라온 많은 해부학적 내용들이 그의 작품입니다.
 
그의 아들 테오도르(theodor)는 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청력을 잃었습니다. 그의 초상화에 보면 우안이 바깥쪽으로 돌아간 외사시가 있습니다. 63세에 건강이 나빠져서 은퇴를 하였는데, 그 다음 날 뮐러교수가 세상을 떠났고, 그도 4주 후 원인 모르게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제자 루딩거(rudinger, 1890)는 쉴렘을 ‘자수성가한 사람(self-made man)'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가난과 신체장애와 어두운 경력을 이겨내고 훌륭한 해부학 교수의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에는 사심이 없는 루돌피 교수의 도움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