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막이야기

02-루이 브라유의 세상을 바꾼 송곳

작성일 2018-10-08 첨부파일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의 세상을 바꾼 송곳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 1809-1852)는 1809년 1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40Km 덜어진 작은 마을 꾸브레이(Coupvray)에서 태어났습니다. 농장과 포도밭을 가진 아버지 시몬 브라유(Simon-René Braille)는 말에 장착하는 안장이나 재갈 등을 만드는 만능제작자이기도 했지요. 루이는 3세 때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송곳을 가지고 가죽에 구멍을 뚫으며 놀다가 왼쪽 눈을 찔렸습니다. 왼쪽 눈은 심하게 감염되어 결국 실명을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1년 뒤 점점 오른쪽 눈도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브라유는 꾸브레이 성당의 신부인 자크 파뤼(Jacques Palluy)의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10세에 파리의 ‘왕립맹아학교(National Institute for the Blind Youth)’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지요. 당시 프랑스의 왕립맹아학교는 전 세계에서 거의 처음 세워진 특수목적학교였지만 사정은 좋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는 감옥으로 이용되었던200년 이상 된 건물이었고, 상한 빵과 물을 제공받은 적도 있었으며, 학생들로부터 무시와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브라유는 5년간 이 모든 것을 견뎠고, 현명하게 공부했습니다. 듣는 귀 하나로 첼로, 피아노와 오르간을 배웠고, 나중에 프랑스 전역의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으며, 25세에 Saint-Nicolas-des-Champs 교회와 36세에 Saint-Vincent-de-Paul 교회의 반주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이들에게 간단한 공예와 장사를 가르쳤는데, 당시 맹아학교에서 사용하던 문자는 맹아학교의 창시자였던 발랑땡 아우이(Valentin Haüy, 1745-1822)가 창안한 ‘돋을새김문자(embossing letter)’였습니다. 맹인들의 꿈의 문자로 알려지긴 했으나 글자가 7Cm나 되도록 구리 선을 종이로 눌러서 크고 도드라지게 표현한 것이므로 책이 크고 너무 무거웠으며, 쓰기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학교에는 14권의 책이 있었고, 루이는 벌써 몇 번이고 읽었지요.
 브라유가 12세(1820년)였을 때 학교장은 초청강사로 육군 포병 장교였던 샤를 바르비에(Charles Barbier) 대위를 초청했는데 그는 ‘음파홀로그래피(sonography)'로 불렸던 ‘야간 문자(night writing)'를 고안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병사들에게 말없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으며, 12개의 ‘돋을 점’으로 문자를 표시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지요. 이듬해 그는 이것을 이용해서 점자를 만들었는데 군인들은 이것을 배우기 너무 어려워했으며, 서서히 잊혀져갔습니다. 그러나 이 문자를 쉽게 익힐 수 있었던 브라유는 이런 문자가 시각장애인들에게 큰 도움일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후 자신의 눈을 손상시켰던 아버지 작업실의 송곳을 이용하여 3년 동안(13-16세) 노력한 끝에 단지 6개의 점만으로 알파벳 26글자를 모두 표시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손가락 끝의 감각만으로 움직임 없이 모든 점을 한 번에 인식할 수 있게 되었지요. 게다가 이러한 점자는 작고, 가볍고, 만들기 쉬워서 쓰기도 가능했습니다. 나중에 이것은 수학과 음악에 응용이 되었습니다.
  그는 19세에 시각장애학생을 가르치는 실습교사로 시작해서 24세에 정교사가 되었습니다. 20세(1829년)에 시각장애인들이 글을 쓰고,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첫 번째 점자책(Method of writing words, music, and plain songs by means of dots, for use by the blind and arranged for them)을, 29세에는 초심자를 위한 두 번째 점자책(Little synopsis of arithmetic for beginners)을 냈습니다. 30세에는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이용하여 비장애인과 소통할 수 있는 10x10 격자 점자방법을 점자책으로 냈습니다. 또한 친구 피에르 푸코(Pierre Foucault)와 함께 점자 타자기를 개발했습니다.    
 그런데 31세에 새로 온 학교장 두파우(Pierre-Armand Dufau)는 미국과 스코트랜드에서 쓰던 새 돋을새김문자에 심취해서 이들이 만든 점자와 점자타자기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들이 만든 73개의 책을 태우기까지 했지요. 그러나 결국 새 돋을새김문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루이의 점자가 점차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결국 1854년 프랑스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정식 문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루이는 왕립맹아학교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교사였습니다만 아쉽게도 26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에 걸렸으며, 35세에 3년간 휴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후 학교로 돌아왔지만 건강이 나빴던 그는 43세(1852년 1월 6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고향인 꾸브레이에 묻혔습니다.
  서거 100주년(1952)에 그의 유물은 프랑스 국립묘지인 판테온(Panthéon) 성당에 옮겨져서 철학자 볼테르(Voltaire),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과학자 마리 퀴리(Maria Curie), 작가 알렉산더 듀마(Alexandre Dumas) 등 위대한 인물들과 함께 했습니다. 탄생 200주년(2009) 때는 유럽 전역에서 그의 행적을 기념했으며, 벨기에와 이탈리아는 2 유로짜리, 인도는 2 루피(rupee)짜리, 미국은 1 달러짜리 기념주화를 만들었습니다. 2006년에 삼성은 브라유 핸드폰을 만들어서 IDEA(Industrial Design Excellence Awards) 금메달을 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브라유처럼 한 쪽 눈을 다쳤을 때 다른 쪽 눈마저 손상되는 병을 교감눈염증(sympathetic ophthalmia)이라고 합니다. 브라유가 앓았던 교감눈염증은 눈에 천공상을 손상을 입었을 때 색소를 포함한 눈 속 세포가 이물질로 여겨지면서 반대편 눈의 같은 색소성 세포가 공격을 당하는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입니다. 외상이 있은 지 2주-3개월 사이에 반대편 눈에 염증이 생기므로 이 병을 막기 위해서 10일 내에 손상 받은 눈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술기법이 좋아져서 천공상을 입은 눈을 살리기도 하며, 면역억제제가 좋아져서 이 병을 거의 보기 어렵습니다.
 교감눈염증을 일으킨 송곳은 루이의 세상을 빼앗아 갔지만 루이는 이 송곳을 이용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돌려준 점자를 탄생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