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막이야기

이성진의 망막이야기 -101

작성일 2007-01-12 첨부파일


누에와 동물과 사람을 모두 살렸던 학자


▲ 이성진 교수
46세(1868)의 이 남자에게 반신마비가 온 것은 콜레라가 마치 죽음의 사신처럼 세상을 휩쓸던 때였습니다. 그 무렵 유럽에는 원인 모를 병으로 동물들도 죽어가고 있었지요. 게다가 장티프스, 결핵, 폐렴, 매독, 디프테리아, 페스트까지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공세를 취하였고, 그의 5명의 자녀들 중 3명도 장티프스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자녀들의 죽음 앞에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한 채 고작 누에고치의 죽음 따위를 연구하고 있었다니...

정말이지 1817년 인도의 벵갈 지방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1820년에는 중국과 필리핀에, 1821년(순조 21년)에는 조선까지 침투를 하였으니까요. 콜레라는 근대화의 물결로 동서양의 교류가 활발한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1826년에는 드디어 유럽 상륙에도 성공하였는데, 1840년에는 프랑스에서 14만 명, 영국에서 2만 명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큰 위력을 보였지요. 파리에서는 하루에 200명 이상이 콜레라로 죽어갔습니다.

이러한 불행은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17세기에 레벤후크(antonie van leeuwenhoek, 1632-1723)가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세상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미경 속의 그 주인공들은 어쩌면 200년간의 자신들에의 존재에 대해 무관심했고,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 무지했던 인간들과 일전을 준비해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이 인간의 몸 속까지 들어온 것은 템즈(thameses) 강을 오염시키고, 그 강물을 식수로 팔았던 인간들 책임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독일에서 자신보다 20살 어린 코흐(heinrich hermann robert koch, 1843-1910)라는 걸출한 젊은 장수가 버티고 있던 것이 다행이었지요. 이 젊은이는 39세(1882)에 결핵균을, 40세(1883)에 드디어 콜레라균을 발견하게 되며, 그 공로로 62세(1905)에 노벨의학상을 수상하게 되니까요. 그러나 콜레라가 정복된 것은 보불전쟁(프랑스와 프러시아간의 전쟁, 1870-1871)에서 야전외과의로 참여한 지 한참 이후에 이루어졌으니까 아직도 먼 후의 이야기였습니다.

반신마비가 된 그의 머리 속에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습니다. 1822년 돌(dole)이라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고, 농노였던 할아버지와 나폴레옹의 직업 군인이었다가 가죽을 만들던 무두장이 아버지를 두었고, 어릴 때는 그림에만 관심이 있었고, 몸이 약해서 학교를 중단한 적도 있었으며, 그러다가 파리의 고등사범학교를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불소를 발견한 화학교수의 조교가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26세에 스트라스부르(strasboug)대학의 화학 조교수로 화학자로서의 발을 내딛었고, 27세에 대학 총장에게 용감히 편지를 써서 총장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32세에 프랑스 북부의 릴(lille)대학 과학부 학장이 되었고, 35세에 라세미산과 주석산의 결정체를 연구하여 구조가 대칭인 분자가 존재하지만 성질은 다르다는 비밀을 풀었고, 릴 지방의 포도주의 맛을 변하게 하는 발효는 유산균이라는 미생물이 활동한 결과라는 것을 밝혔고, 40세에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음식의 부패는 공기 중의 균과 접촉하여 생기는 것이지 음식 자체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백조 목 모양의 관이 달린 플라스크를 이용하여 증명하였고(아래 그림), 57도 정도의 열을 가하여 해로운 세균을 파괴시키는 저온살균법을 개발하였고, 43세에는 정부로부터 비단과 관련된 누에의 병을 연구해 달라는 정부의 요청에 프랑스 남부로 이사한 것들 말입니다.

‘누에를 위해 그렇게 몸을 버려가며 연구를 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있는 콜레라를 연구한 것도 아니고 단지 누에인데... 게다가 일부 주인들은 그의 연구가 실패하여 결국 자신들은 큰 손해를 볼 것이라며 비판까지 하잖아.’ 그가 자리에 눕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던 주변 동료들은 그렇게 동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다룰 수 있는 의사가 아니라 화학자였고, 그가 걸어야 할 길이 따로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괴로워하는 누에를 볼 때 장티프스에 걸렸던 아이들이 생각났으며, 그런 그에게 프랑스의 비단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누에의 죽음은 그가 마땅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던 것이지요.

3개월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다시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결국 세균에 오염된 뽕나무 잎을 먹었기 때문임을 발견하였고, 깨끗한 뽕나무 잎을 먹임으로 누에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지요. 이 연구를 통해 그는 어떤 질병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주인공인 미생물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는 이론을 생각하였습니다. 이 쯤 되면 그가 누구인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그는 바로 세균학의 창시자인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입니다.

그렇지만 의사들은 여전히 그의 생각을 무시했습니다. ‘인간의 전염병이 미생물에 의해 발생한다니 정말 어처구니없군.’ 또한 파스퇴르는 의사가 아니었으므로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화학자가 의학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 그의 생각을 현실화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콜레라와 결핵을 연구한 독일의 젊은 장수 코흐였습니다. 결국 파스퇴르의 학설은 높이 평가를 받게 되어 독일 본(bonn) 대학은 그에게 명예 의사 자격증을 주었고, 51세에는(1873) 의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파스퇴르는 이제 전염병 억제를 향한 연구를 한층 더 폭넓게 추진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병이란 세균과 세균이 침입하려는 세포 조직과의 생존을 건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탄저병에 걸린 소가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것과 그 소에 강력한 탄저병균을 주사해도 죽지 않는 것을 보고 병에 대한 저항력이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질병이 특정한 병균에 의해 발생하므로 이 병균을 분리해 약화된 형태로 배양해서 동물에게 주사하면 면역력을 키울 수 있다고 결론짓고 가축의 탄저병과 닭 콜레라 등의 백신을 개발했지요. 이것은 곧 면역학의 시초였습니다. 그 후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많은 동물이 예방 접종을 받게 되었는데 프랑스에서만 50만 마리의 양과 8만 마리의 소가 접종을 받았다고 합니다. 수많은 누에와 양과 소가 그의 손에 의해 살아난 것이지요.


1885년 7월 6일 아침에 한 부인이 미친개에게 14곳을 물린 아홉 살짜리 소년을 데리고 옵니다. 파스퇴르는 광견병 백신을 인간에게 접종하는 데는 아직도 위험을 느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학 아카데미의 동료들과 상의하였습니다. 그 날 밤에 동료 의사를 불러 광견병으로 죽은 토끼의 척수에서 추출한 백신을 소년에게 주사하였습니다. 결국 그 소년은 광견병에 걸리지 않았으며, 이 소식은 이내 널리 퍼졌고, 각지에서 광견병에 걸린 개나 늑대에게 물린 농부들이 몰려왔습니다. 물론 그들도 광견병에서 구출되었구요.

과학 아카데미가 광견병을 치료하기 위해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자(1888) 온 세계로부터 많은 기부금이 답지했습니다. 파스퇴르는 반신불수의 몸을 끌고 70세 가까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정신을 본 받은 제자들 중 루(roux)와 에르생(yersin)은 수천 명의 어린 생명을 앗아간 티프테리아의 치료법을 개발해 냈습니다. 총명했던 메치니코프(metchnikoff)는 사람의 몸이 어떤 식으로 세균하고 싸워 면역을 키우는지를 밝혀냈습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한 파스퇴르에게 에르생이 페스트균을 발견한 후 현미경으로 보여주자 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습니다. ‘아직도 할 일이 산처럼 많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