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막이야기

이성진의 망막이야기 -109

작성일 2007-02-08 첨부파일

‘왕의 안수’(royal touch)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마가복음 16장)

중세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왕들이 환자에게 손을 대면 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을 ‘왕의 안수(royal touch)’라고 하였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도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중세의 왕들은 그들의 이러한 능력이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대성당을 건립한 영국의 ‘참회의 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 1022-1066)’로부터 전달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왕의 능력은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비스(king clovis) 1세를 개종시켜 프랑스 그리스도교를 크게 발전시킨 주교 레미기우스(saint remigius)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는 한 달에 533명에게, 프랑스의 헨리(henry) 4세는 한 번에 1,500명에게 ‘왕의 안수’를 주었습니다. 영국에서는 1660년에만 6,000명이 넘은 사람이 ‘왕의 안수’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는 1825년까지 600년간 ‘왕의 안수’가 계속되었습니다. ‘왕의 안수’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천사(angel)라는 금화를 목 주위에 대 주었습니다. 왕은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올렸습니다. ‘왕은 네게 안수하며, 신이 너를 치료하시리라(the king toucheth thee; the lord healeth thee.)’

1768년에 영국인 몰리(john morley)는 왕의 손길을 받은 병들의 증상과 경과들 그리고 다양한 치료법과 그 효과에 대하여 자세히 책(essay on the nature and cure of scrophulous disorders, commonly called the king's evil)에 기록하였습니다. 과연 병의 경과가 ‘왕의 안수’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책은 1824년까지 42회의 증보판을 내었습니다.

피부샘병(scrofula, 연주창, 목림프선병)는 결핵의 일종으로 특히 목의 림프절들을 여기저기 침범하고, 목 주위의 피부에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는 질환을 말합니다. ‘scrofula’라는 말은 라틴어로 ‘한 배의 새끼들’(scrofulae, brood sow)이란 뜻이 있는데 목 주위에 주렁주렁 생긴 염증 덩어리가 꼭 그런 모양입니다. 대부분 어른들에게서 생기고 결핵균이 원인입니다. 당시 많은 피부샘병 환자들은 눈에도 결핵균이 침범하였습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맥베드(macbeth) 4막 3장에 보면 붓고, 염증이 있는 불쌍한 눈을 가진 환자에게 왕이 방문하여 금화와 함께 ‘왕의 안수’를 내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중세시대에 피부샘병 환자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낫기 위해 부어있는 목 부위를 수술로 째보았으나 오히려 다른 곳에 새로운 염증을 만들었으며, 수술 상처가 낫지 않아 고름이 계속 새는 등 더 큰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몸은 말라가고, 기운은 없었으며, 목은 부었고 여기저기에서 고름이 흘러내렸으며, 눈은 염증으로 실명의 위기에 놓여있었으니까요.

중세시대에는 이 병을 ‘왕의 재난(king's evil)’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불쌍한 이 환자들이 유일하게 바라보던 공식적인 치료법은 바로 ‘왕의 안수’였습니다. 처음에 ‘왕의 안수’는 모든 질병에 전반적으로 시행되었으나 루이(louis) 6세 때부터 마지막 왕 루이 16세 때까지는 주로 이 피부샘염에 국한되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1609년 파리의 해부학자와 의사였으며 화가이기도 하였던 로렌스(andre de laurens, 1558-1609)가 동판에 헨리 4세의 ‘왕의 안수’를 새긴 것으로 ‘scrofula-andre-du-laurens-1609’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1,000만 명이나 되는 새로운 결핵 환자들이 생깁니다. 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결핵은 6.25 전쟁 전후로 매우 흔한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bcg 예방접종과 항생제의 사용으로 결핵환자가 줄어들었지만 1990년에 72만 명의 환자가 있었으며(인구 50명 중 1명) 아직도 비교적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도 결핵이 흔한 나라로부터의 이민과 에이즈가 늘어나면서 결핵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1989년 미국의 대표적인 대도시 샌프란시스코에 286명의 새로운 환자가 발생했으며, 미국인 2,500명 당 1명 정도가 결핵환자라고 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500만 명의 에이즈 환자가 결핵에 걸렸다고 추산합니다.

결핵이 있을 때 눈 속에 염증(포도막염, uveitis)이 생깁니다. 우리나라의 결핵환자들은 비교적 건강하여 포도막염이 흔하지 않지만 에이즈 환자나 다른 면역이 저하된 환자들에게서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눈 속의 염증은 때로 망막의 혈관을 막아버리고, 심하면 망막에도 염증을 일으켜 실명을 유발합니다.

포도막염이 동반된 결핵은 4가지 약물(isoniazid, rifampicin, pyrazinamide, ethambutol)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피라진아마이드(pyrazinamide)는 아이소니아지드(isoniazid)로 인한 신경손상을 예방하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그러다가 2개월이 지나면 망막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에탐부톨(ethambutol)은 끊습니다. 이러한 약물은 8개월 정도 복용해야 합니다. 결핵균과 싸우는 참으로 괴로운 시간들입니다. 그러나 치료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나는 망막환자들은 대부분 실명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오직 하나, 다시 예전처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수술을 통해 다시 시력을 회복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이럴 때 신성한 능력이 내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왕의 안수’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 때마다 나는 참으로 부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저는 ‘왕의 안수’를 한 왕들은 분명히 모범될 만한 삶은 살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살면서 어떻게 ‘나의 안수는 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왕이면서 성직자와 같은 모범을 보였을 것입니다. 불쌍한 백성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왕의 안수를 신뢰하였을 것이구요. 물론 신은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고, 모든 은밀한 기도를 들으실 수 있으므로 그런 왕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왕은 없다는 것이 한 편으로 슬퍼집니다.

그러나 신이 살아 계시다면, 그리고 그 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왕이 되어 병든 가족을 위해 기도를 할 수 있으며, 그 기도는 응답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