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막이야기

이성진의 망막이야기 -114

작성일 2007-04-12 첨부파일

청소기에 싸인 찌꺼기 - 드루젠(drusen)


눈부신 아침 햇살이 창문을 가린 커튼 사이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눈은 감았지만 따스한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눈을 떠 봅니다. 보통 때처럼 지난밤에도 뇌는 나를 재운 후 혼자서 부지런히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어쩌면 낮에 찍어둔 영상들을 다시 돌려보며 영화 한편을 편집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뇌는 나름대로 자기발전을 꾀하고 있던 중이었겠지요. 편집 중간 중간에 나의 심장과 폐는 무엇인가에 자극을 받아 거칠게 움직이며, 눈동자는 놀라서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밤사이에 보통 다섯 번 정도는 그러합니다. 다 합치면 90분 정도이니 정말로 영화 한편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내용을 편집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뇌에게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일과임이 틀림없습니다.

눈이 흔들릴 때에 나는 꿈을 꿉니다. 중간뇌(midbrain)와 숨뇌(medulla oblongata) 사이의 다리뇌(pons)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시신경의 중간 정거장인 무릎체(geniculate body)로 그것을 전달하는군요. 정거장에서 신경을 갈아탄 그 이야기들이 시각중추로 이동되어 꿈으로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간혹 그 이야기 속에는 괴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황당하고도 재미있는 것들입니다. 뇌가 꿈을 회상하는데 필요한 호르몬 분비를 차단한 것을 보면 그가 밤새 보여준 비밀이 새어 나가길 꺼려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밤사이의 일은 잊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으니까요. 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영상을 찍기 시작합니다.

커튼을 열자 세상을 충만히 채운 빛의 입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로 달려옵니다. 움찔하며 몸을 떠는 사이 어느 새 수천억 개의 빛의 입자들은 각막 위에 코팅된 세 겹의 눈물막을 지나고, 다섯 겹의 각막을 통과한 후 앞방(anterior CHAmber)에 있는 물(aqueous humor, 방수)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검은 홍채 사이의 둥근 동공은 살아 숨 쉬는 말미잘의 입처럼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그 크기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소용돌이치며 솟아오르는 물길은 장엄하였습니다. 그 물은 이 세상 어떤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참으로 맑고 깨끗한 물이었지요. 빛의 입자들도 이곳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었지만 가야할 길이 남았습니다.

잠시 후 그들은 수정과 같이 맑은, 둥글고 거대한 달(lens, 수정체)을 지나게 됩니다. 이 달의 가장자리는 거대한 밧줄들(zonule, 소대)에 묶여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수많은 밧줄은 굉음을 내며 사방에서 달을 당기기도 하고, 압박하기도 합니다. 그 때마다 달의 모양은 바뀝니다. 사방에서 무질서하게 들어온 빛의 입자들은 달의 모양에 맞추어 질서를 잡아갑니다. 그 사이에 달은 짧은 파장의 입자들을 검색하여 출입을 금지시킵니다. 혹시라도 짧은 파장의 입자들이 들어오게 되면 눈 속에 있는 1억 개의 보금자리들이 파괴될 수 있으니까요.

달을 통과한 입자들은 이제 거대한 바다(vitreous, 유리체)를 지납니다.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바다를 가로지르는 수천억 개의 빛나는 입자들. 마치 밤하늘을 환하게 수놓은 별들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듯 보입니다. 이렇게 장엄한 광경을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빛의 입자들은 수백만 개의 망막세포들을 지나 그들만의 보금자리에 거의 다 왔습니다. 저 아래에는 1억 개도 넘는 원뿔모양(cone cell)과 막대모양(rod cell)의 집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강, 초록, 파랑 지붕들이 참 아름답습니다. 집집마다 수백 층이나 되는 피라미드 모양의 방들이 있는데, 각 방에는 수많은 광디스크들이 나란히 꽂혀있습니다. 그 광디스크에는 빛의 입자 하나 하나를 포근히 감쌀 수 있는 단백질(opsin, 옵신)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각 집마다 1억 개나 된다는군요. 단백질들이 빛의 입자들을 만나자 광디스크들은 불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1억 개의 불을 밝힌 1억 개의 집. 이 또한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경이롭습니다.


한 번 불을 밝힌 광디스크들은 다시 사용될 수 없습니다. 한 번 사용된 광디스크들은 특별한 청소기(망막색소상피, retinal pigment epithelium)에 의해 제거된 후 용해소체(lysosome)라는 장치 속의 약품에 의해 흔적도 없이 폐기처분 됩니다. 연이어 들어오는 새로운 빛의 입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처분된 만큼의 새로운 광디스크들이 만들어집니다. 눈을 감지 않는 한 집집마다 광디스크를 만드는 소리와 다 써버린 광디스크를 제거하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광디스크에 불이 켜지면 전기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1억 개의 집에서 나온 각각의 전기들은 시신경(optic nerve) 전선이 되어 뇌에 전달됩니다.

태양은 서산에 지고, 어둠이 찾아옵니다. 드디어 뇌가 자신만의 일을 해야 할 시간이 다시 돌아왔군요. 뇌가 눈꺼풀은 무겁게 만들어버리자 눈은 스르르 감깁니다. 더 이상 빛의 입자는 눈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제 모든 눈 속의 세상은 쉬어야 할 때입니다. 간혹 뇌가 영화를 편집할 때 눈이 격렬하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불을 끈 모든 집은 고요한 휴식에 빠져들어 갑니다.

한 번 쓰고 난 광디스크들이 청소기(망막색소상피) 안에서 아무런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처분 되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50년 정도 되자 광디스크를 폐기처분하는 청소기에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군요. 조사를 해 보니 아무래도 가끔씩 달의 검색을 피해 들어온 짧은 파장의 자외선 입자들이 청소기에 문제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물론 담배, 고혈압, 고지혈증도 한 몫 담당했습니다. 먼지처럼 찌꺼기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이 찌꺼기 덩어리가 눈에 보일만큼 쌓였습니다. 이 덩어리들은 청소기가 일을 하기 어렵도록 아래쪽의 혈액공급을 막고 있습니다. 청소기가 일을 못하게 되면 광디스크가 제거되지도, 재생되지도 못하여 결국 빛이 머물러야 할 보금자리가 망가져버린다는 것은 이해하시겠지요? 이 기름 찌꺼기들을 드루젠(drusen)이라고 합니다. 바로 황반변성의 원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