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막이야기

이성진의 망막이야기 -118

작성일 2007-06-05 첨부파일


치료를 받고 시력이 떨어져도 좋습니다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스미스 부부(mr. and mrs. stmith)'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는데, 나중에 실체를 조금씩 알고 보니 그들은 서로를 죽여야 하는 반대편 에이전시 소속의 킬러들이었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만 황반변성(age-related macular degeneration, amd, 나이관련황반변성)이라는 병을 보면 그 시작부터 끝이 아이러니한 이 영화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반변성에서 망막을 결국에 파괴해 버리는 신생혈관은 맥락막(choroid)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맥락막은 원래 망막에 생명을 공급하는 혈관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 사이에 찌꺼기(drusen, 드루젠)가 끼게 되고, 혈액 공급이 방해를 받게 되자, 맥락막은 새로운 혈관을 만들어서라도 망막을 살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신생혈관이 망막을 파괴하는 주범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그 범인을 제거해야 망막이 생존할 수 있습니다. 약 25년 전에 그 범인을 레이저로 제거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맥락막이 망막의 아래층에 있기 때문에 레이저를 쏘아 신생혈관을 제거하려면 망막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신생혈관 크기만큼의 망막도 같이 타버리는 의미입니다.

마치 나의 절친했던 친구가 이제는 생존을 위해 제거를 해야 하는 적으로 변해버리는 그런 순간이며, 그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나의 희생을 먼저 각오를 해야 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마치 ‘스미스 부부’가 결정해야 했던 황당한 선택과도 같지 않습니까?

레이저 치료를 시행하려 했던 그 당시 학자들은 아직 기능이 남아있는 망막을 같이 태워버릴 수밖에 없는 점을 고민하였습니다. 그래서 레이저로 자신(망막)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적(맥락막신생혈관)을 제거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레이저로 황반부를 태우는 연구’(mps study, macular photocoagulation study, 황반광응고연구)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걸고 환자들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단 등록한 환자들은 치료를 하는 군과 하지 않는 군으로 나뉠 것이며, 자신이 어떤 군에 속하든지 또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상관없이 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 연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실명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뇨망막병증의 레이저 치료를 처음 시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희생이 적어도 후대의 치료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던 용감한 미국인들은 기꺼이 등록하였습니다.

학자들은 먼저 시력을 담당하는 망막의 중심부(중심오목, fovea)에서 좀 멀리 떨어진(extrafoveal, 중심오목 바깥) 신생혈관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레이저로 치료를 해도 중심시력에는 영향이 덜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치료 후 5년째 결과를 보니 치료를 받은 군은 심한시력소실(severe visual loss, 시력표에서 6줄 이상 시력이 감소한 경우로 대부분 실명상태에 가까움)이 46%인 반면, 치료를 받지 않은 눈은 64%였습니다. 레이저 치료로 ‘시력을 회복했다’가 아니라 ‘심한시력소실을 좀(18%) 줄일 수 있었다’에 불과했지만, 이것은 그 당시 희망적인 결과였습니다.

학자들은 용기를 내어 이번에는 신생혈관이 망막의 중심부 바로 근처까지(200μm 안쪽) 침범한 경우(juxtafovea, 중심오목 근처)를 연구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중심부에 더 가깝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중심부를 태워서 실명을 시킬 수도 있습니다. 치료 후 3년 째 어르신들의 결과를 보니 치료를 받은 군에서 심한시력소실이 49%, 받지 않은 군에서 58%였습니다. 즉 이 경우에도 치료를 받은 군에서 심한시력소실을 9% 정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중심부 아래에 신생혈관이 있는 경우(subfoveal, 중심오목밑)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레이저로 지지게 되면 사물의 초점이 맺히는 중심부 망막도 타버리므로, 내가 보려고 하는 중심부위는 시커먼 점(암점, scotoma)으로 보일 것입니다. 즉 지금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망막 중심부의 기능이 레이저 치료로 인해 오히려 완전히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치료를 하게 되면 어르신 시력이 곧바로 떨어집니다. 저희는 이렇게 하는 것이 어르신의 시기능을 조금이라도 더 보전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지만, 과연 치료를 하지 않고 그냥 두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설명을 드려야 하는 의사도 그러했겠지만 이런 설명을 들으셔야 했던 어르신들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러나 용감하신 우리의 어르신들은 연구대상을 자청하였습니다. 치료 후 2년째 발표한 결과를 보면 ‘어르신들 눈은 치료를 받은 직후 평균 3줄의 시력이 더 떨어졌다. 그러나 2년 후에 보니 치료를 받은 군은 심한시력소실이 20%인 반면, 치료를 받지 않은 군은 37%였다.’

이 연구 결과가 그냥 이대로 끝났다면 그나마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르신들은 또 한 번의 괴로움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즉 레이저 치료를 시행한 지 1년 만에 치료하나 주변으로 새로운 신생혈관들이 또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중심부에서 떨어진 신생혈관의 경우 46%에서, 중심부 바로 아래에 생긴 경우 31%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날의 황반변성 치료는 망막과 맥락막을 그대로 보전한 채 신생혈관만을 제거하는 광역학요법(photodynamic therapy)이나 혈관생성인자를 억제하는 약물(anti-vegf drug)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치료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25년 전 이 드라마와 같은 레이저 치료의 어려움을 감내하신 어르신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황반변성 치료에 임할 때마다 그 때 그 어르신들의 말 없는 외침이 귀에 쟁쟁합니다.

‘치료를 받고 당장 시력이 떨어져도 좋습니다. 그리고 혹시 치료를 받지 않아서 시력이 떨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약속한 기간까지 치료를 해 달라고 조르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아들들은 좀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