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막이야기

이성진의 망막이야기 -137

작성일 2008-04-21 첨부파일


‘0’ 이 되는 순간 - 정시화(emmetropization)


▶ 이성진 교수<순천향의대 안과학교실>
이제 막 태어난 아가들의 눈은 청년들의 눈과는 좀 다릅니다. 눈의 구조가 바뀔 리야 없겠지만 세상을 보는 방법이 다른 것은 확실합니다. 많은 청년들의 눈이 가까운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아가들의 눈은 먼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니까요. 이러한 아가들의 눈을 원시(hyperopia)라고 하며, 사물의 초점이 망막의 뒤 쪽에 맺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것을 보기 위해서는 뒤쪽에 맺힌 초점을 앞으로 당겨올 수 있는 돋보기가 필요합니다.

“아빠, 그럼 아가가 자라면 가까운 것을 잘 보는 눈으로 변하게 되나요?”

“그렇단다. 지혜야.”

“그러면 둘 다 잘 보이는 때도 있겠네요?”

원시를 (+), 근시를 (-)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안경이 필요 없는 좋은 눈, 정시(emmetropia)는 0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0이 되는 것을 정시화(emmetropization)라고 합니다. 0의 순간은 보통 6살을 전후로 지나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0과 오래 동안 만나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은 아쉬운 이별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근시가 심한 사람이라도 어렸을 때 한 번은 0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어릴 때 돋보기 놀이 해 보셨지요? 돋보기로 태양 빛을 한 점에 모이게 하여 종이를 태우는 놀이 말입니다. 0이 되는 과정은 바로 이 돋보기 렌즈와 관련이 있습니다.

막 태어난 아가는 3.5 디옵터의 원시(+3.5)입니다. 그만큼 초점이 망막의 뒤에 맺힌다는 뜻이지요. 아가의 눈 속에 있는 돋보기 렌즈(lens, 수정체)의 파워가 약해서 그럴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가의 렌즈는 무려 45 디옵터(+45)나 되니까요. 어르신들이 노안 때문에 쓰시는 돋보기가 보통 3디옵터라고 볼 때 아가의 렌즈 파워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돋보기가 모을 수 있는 빛의 초점거리보다 눈의 크기가 더 작군요. 그래서 초점은 망막의 뒤쪽에 맺힐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의 눈은 6살이 될 때까지 한 달에 평균 80μm씩 커집니다. 그렇게 커지다 보면 저절로 돋보기의 초점이 맺혀있는 곳까지 도달하겠군요. 그런데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렌즈 주위에 붙어있는 끈(모양체소대, zonule)들이 눈이 커짐에 따라 서서히 당겨져서 렌즈의 모양이 조금씩 납작해지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돋보기의 도수가 점점 감소합니다.

6살이 되면 렌즈의 도수는 처음의 반 정도인 23 디옵터(+23)로 줄어버립니다. 도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초점거리가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눈은 점점 커져서 렌즈의 초점거리를 맞추려고 애쓰고 있는데, 렌즈 도수는 점점 낮아져서 초점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눈의 크기가 커질수록 창문역할을 하고 있는 돔 모양의 각막(cornea, 검은자)은 조금씩 평편해져서 이것 또한 초점거리를 점점 뒤로 가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6년에 걸친 술래잡기는 눈의 성장이 렌즈의 변화를 따라잡음으로써 막을 내립니다. 즉 정시화라는 것은 눈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각막의 돔 형태가 완만해지고, 수정체의 두께가 얇아지는 서로 다른 변화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결국 초점 거리를 망막에 정확히 맺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이루어지면서 정상적인 시력을 얻게 되고, 눈의 각 기능은 완성이 됩니다. 그 이후에도 눈은 성장하지만 수정체와 각막의 변화는 매우 정밀하게 변화하며 0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0을 만드는 과정은 정밀한 수학적인 계산으로도 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눈의 성장이 유전과 환경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며, 그에 따라 각막이나 수정체의 변화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치 평행하지 않는 두 직선은 결국 한 점에서 만난다는 수학의 정의처럼 모든 눈은 6살의 0에서 만나게 됩니다.



마침내 0이 되는 순간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0이 되는 순간, 빛은 각막을 지날 때 정확히 필요한 각도로 굴절이 되어 렌즈에 전달되고, 다시 렌즈를 지난 빛은 각막으로부터 24mm 뒤에 자리 잡고 있는 100um의 두께의 망막 - 더 정확히 말하면 망막의 가장 깊숙이 숨겨져 있는 시세포(photoreceptor cell, 광수용세포, 원뿔세포와 막대세포) - 에 정밀한 초점을 맺게 하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정시화 과정이 동물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중에 병아리 눈에 있는 수정체는 놀랍게도 15 디옵터의 원시(+15)로부터 10 디옵터의 근시(-10)에 이르는 무려 25 디옵터의 변화를 담당하며 정시화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동물실험들을 통하여 0이 되는 것은 눈의 각 조직이 망막에 깨끗한 상을 맺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능동적인 과정이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자동카메라가 초점이 흐려졌을 때 초점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과학자들은 0을 유지하는 비밀을 풀 수만 있다면 근시를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때 미소가 참견을 하는군요.

“아빠, 아가들이 왜 먼 것만 잘 보는지 알 것 같아요.”

“왜 그럴까?”

“꿈을 꾸니까요.”

흠... 꿈이라... 정시화에 이런 동화와 같은 이론도 다 있군요.

여러분, 우리의 눈이 0이 되었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맨 눈으로 깨끗이 볼 수 있었고, 꿈과 현실이 교차하던 세상의 중심에 홀로 우뚝 섰던 그 여섯 살 어린 시절 말입니다. 분명히 우리도 그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로 돌아가서 우리의 눈을 볼 수 있다면 나도 모르게 정말 아름답다는 탄식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 앞에서 너무 일찍 꿈을 포기하고, 스스로 근시안이 되기를 선택하지는 않았는지요.

정시화 과정은 우리 눈의 잃어버린 꿈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내게 화려한 과거가 있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힘이 솟구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시화 과정은 우리의 새로운 꿈과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