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막이야기

이성진의 망막이야기 -142

작성일 2008-09-14 첨부파일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비밀



▶ 이성진 교수<순천향의대 안과학교실>
1860년대 프랑스의 젊은 미술가들은 기존의 화실에서 벗어나 햇빛이 찬란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그림은 기존의 사실적 화풍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고, 태양 빛에 따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색의 변화를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늘은 항상 푸른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붉거나 노랗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주제와 기교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캔버스에서 물감을 섞는 대신 캔버스에서 반복된 작은 붓의 터치로 색을 혼합하였고, 검은색과 회색 대신에 원색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1874년 파리 전시회에 출품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유화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 rise, 아래 그림)’는 바로 ‘인상주의(impressionism)’라는 명칭을 탄생시킨 불후의 명작입니다. 먼 곳의 풍경이 뭉개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그 당시 혹독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사물에서 전해지는 느낌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네와 함께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 르느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드가(edgar degas, 1834-1917), 피사로(camillo pissaro, 1830-1903)와 같은 젊은 화가들은 그 당시 전문가들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빛의 화가’로 불리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독특한 화풍이 그들만의 비밀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 비밀이란 다름 아닌 근시(myopia)를 말합니다. 실제로 모네, 드가, 피사로, 세잔느는 심한 근시였으며, 평소에 안경을 쓰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일부 학자는 인상파 화가들이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한 근시 화가들의 모임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polland w, 2004, acta ophthalmol scand)

호주의 신경외과 전문의인 노엘 댄(noel dan) 박사는 외곽선이 부드럽고, 세부 묘사가 없으며, 역동적인 색상을 활용한 인상파 작품의 특징은 근시의 영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일부 화가들의 작품에서 붉은색이 유난히 많이 사용된 것은 스펙트럼이 짧은 파란색보다는 붉은색을 더 잘 인식하는 근시의 특성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근시는 먼 것을 잘 볼 수 없다는 뜻이므로 근시가 있던 인상주의 화가들이 풍경화를 그릴 때 실제의 모습보다는 그들의 망막에 맺힌 느낌을 전달하기 원했는지 모릅니다.(bbc 2003) 르누아르의 작품(le moulin de la galette)에서 근거리 표현에 비해 원거리 묘사가 현저히 떨어진 것은 바로 근시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잔(paul cezanne, 1839-1906)도 근시였으며, 당뇨병을 앓았습니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세잔은 결코 안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잔느의 근거리 정물화는 매우 명확하고 사실적이었지만, 먼 거리의 풍경화는 인상파의 화풍처럼 명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굴곡져 있습니다. 마치 눈이 좋은 사람이 돋보기를 쓰고 먼 것의 풍경을 보고 그린 듯합니다.

근시가 그림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는 스웨덴 출신의 풍경화의 거장 아구엘리(ivan agueli, 1869-1917)의 그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그림을 시작하였으나 곧 파리로 건너가 활동을 한 화가입니다. 평소에 안경을 쓰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눈이 풍경을 캔버스로 옮기는데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제자 중 하나는 아구엘리과 같이 그림을 그릴 때 마치 볼록한 크라운 유리를 통해 사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근시는 그로 하여금 마치 광각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독특한 풍경화를 그리게 하였습니다.



항상 새로운 시도는 비난을 받기 마련이며, 인상주의 화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인상주의라는 닉네임도 비평가의 날카로운 비판의 단어로 사용된 것이었으니까요. 오직 모네만이 생전에 인상주의 화풍의 성공을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릴 때마다 혹독한 비평을 감수해야 했으며,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도 그림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다른 이들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이 그림들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들의 그림은 후에 시력이 좋은... 흐릿하고 몽롱한 인상주의와는 달리 치밀하게 계산된 점묘법의 풍경화를 그렸으므로... 쇠라(seurat)와 시냐크(signac)가 이끄는 신인상주의, 세잔(sezanne), 고흐(gogh), 고갱(gauguin)과 같은 후기인상주의 뿐 아니라 현대 미술의 근간이 되었던 마티스(matisse)의 야수파나 피카소(picasso)의 입체파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먼 것을 잘 보지 못하는 근시이기 때문에 가까운 인물화나 정물화를 고집했다면 인상주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근시면서도 눈으로는 잘 확인되지 않는 먼 거리 풍경화를 고집했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풍경화를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위대함이 미술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나 새롭게 시도한 그림 기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이 평생 인정받지 못한 자신들만의 그림을 고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희미한 근시 너머의 세상을 비추던 생명의 빛을 보게 되었고, 그 느낌을 어떻게 그림에 담는지 알게 되었으며,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