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막이야기

이성진의 망막이야기 -144

작성일 2008-10-28 첨부파일


조종사의 눈에 박힌 파편

▲ 이성진 교수<순천향의대 안과학교실>
안과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영국의 안과의사 해롤드 리들리(nicholas harold lioyd ridley, 1906-2001)를 자신 있게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최초로 백내장 환자 눈에서 혼탁해진 수정체(lens)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인공수정체(intraocular lens)를 넣어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안과의 임상적 치료에 대한 개념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찰스(CHArles ridley)는 해군 외과군의관으로 있을 때 혈우병으로 인한 관절출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이 조금 쉬운 안과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결국 건강문제로 전역을 하였습니다.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1555년에 순교한 조상의 이름을 따서 니콜라스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아들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관절염으로 고통당하는 모습을 마음아파하며 의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리들리는 의대를 졸업한 후 성토마스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허비(hubby)나 호이네(hoyne)와 같은 좋은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리들리에게 수술을 잘 할 수 있는 좋은 손과 예전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해군 외과군의관으로 일을 마친 후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어필드(moorfield) 병원의 안과에서 18개월의 수련을 거쳐 안과 전문의가 되었습니다.(1938) 그는 여기서 당시에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던 백내장 수술법 - 혼탁한 수정체(lens)를 껍질과 함께 제거하는 방법(icce, intracapsular cataract extraction) - 대신에 껍질은 놔둔 채 혼탁한 알맹이만 꺼내서 제거하는 방법(ecce, extracapsular cataract extraction)을 익혀서 합병증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은 백내장 수술 후 눈 속에 수정체가 없기 때문에 두꺼운 돋보기를 써야 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 해(1939)에 이차대전이 일어났고, 그는 공군 군의관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세상은 서서히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하루는 눈에 큰 부상을 입은 조종사 한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 속에는 총격을 받아 부서진 조종실 덮개의 파편조각이 박혀있었습니다. 그 상황이라면 누구나 빨리 파편을 제거하고 눈을 봉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좀 달랐습니다. 그는 조종사의 눈을 자세히 검사하면서 남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심하게 다친 눈에 왜 염증이 별로 없을까’, ‘눈 속에 박힌 뾰족한 플라스틱은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는 조심스럽게 제거한 파편조각을 들고 어디서 이것을 만들었는지 수소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만든 곳은 1926년 런던 맨체스터 광장에 설립된 ici(imperial chemical industries)라는 화학공장이었습니다. 조종실 덮개는 pmma(polymethyl methacrylate)라는 특수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pmma가 눈 속에 넣어도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물질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백내장 수술로 제거한 알맹이 대신에 인공으로 만든 렌즈를 껍질에 넣어주면 두꺼운 안경 없이 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눈 속에 넣을 수 있는 인공수정체를 고안하였으며, 브라이튼(briton)에 위치한 레이너(rayner)라는 회사가 제작을 담당하였습니다. 또한 요즘과 같은 가스 소독이 없었으므로, 세트리마이드(cetrimide)를 이용한 화학소독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무어필드병원은 새로운 수술의 첫 예를 자신들의 병원에서 해 달라고 의뢰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환자에게 수술을 할 때가 되자 혹시라도 실패하면 실명될 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몰려들었습니다. 과연 자신의 판단이 옳은 것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결국 그는 첫 수술이 실패할 경우 무어필드병원의 명성에 흠집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여 그 제안을 사양했습니다.

드디어 1949년 11월29일에 성토마스 병원에서 백내장이 있던 43세 여자환자의 눈 속에 첫 번째 인공수정체(사진)가 삽입되었습니다. 이 수술은 먼저 혼탁한 수정체를 제거하고, 3개월 후에 인공수정체를 넣는 방식이었습니다. 다행히 시력이 0.7로 잘 나왔고, 큰 합병증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자신감이 생긴 그는 1950년에 2, 3, 4번째 수술을 무어필드병원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1952)에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윌스아이병원(wills eye hospital)에서 이 렌즈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많은 영향력 있는 안과 의사들은 이 수술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눈 속에 넣은 플라스틱 조각은 거부반응을 자초하여 결국 실명하게 만들고야 마는 시한폭탄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있는 몇몇 예들이 발견되었고, 삽입했던 인공수정체를 제거해야 하는 경우들도 생겼습니다. 그러자 미국에서 1950-60년대를 풍미한 듀크-엘더(DUKE-elder)와 같은 대가들은 이러한 수술법을 무시하였으며, 그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하였습니다.

또한 ‘인공수정체(iol)가 아니라 자궁내삽입장치(iud)를 만든 것 아니냐’는 비난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습니다. 게다가 1960년대에 스페인의 거장 바라케(jose barraquer)가 근시를 교정하기 위해 수정체가 있는 상태에서 넣은 인공수정체들이 실명을 유발할 정도로 각막에 문제를 일으키게 되자 비난은 더 거세졌습니다. 왜 안경이나 콘택트렌즈로 충분한 것을 실명을 감수하면서 까지 눈 속에 인공물을 삽입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리들리에게 초이스(peter choyce)가 같은 친구가 없었다면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연구를 거듭하여 새로운 수술법과 렌즈고정법을 개발하였으며, 거기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혼돈 속에 런던에서는 국제 인공수정체 모임(iiic, inteRNAtional intraocular implant club)이 결성되었습니다. 인공수정체에 대한 비난은 무려 1980년대까지 30년 이상 계속되었지만, 그들에게는 비난이 오히려 합병증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수술기법과 인공수정체를 개발하는 계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의 새로운 렌즈(choyce mark viii & choyce mark ix anterior CHAmber lenses)는 1981년 미국 식약청(FDA)의 안전성 검증을 거쳐 사용허가를 받았습니다.

요즘은 인공수정체가 없는 백내장 수술을 생각할 수 없으며, 수술법도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최초의 인공수정체를 만들었던 레이너사가 최근에 개발한 모델은 직경 2mm의 주사대롱에 인공수정체를 접어 넣은 후 작은 절개를 통해 눈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리들리의 업적은 그가 받은 수많은 상으로도 값을 매길 수가 없을 만큼 놀라운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해(2000)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자신의 주치의였던 94세 할아버지 리들리에게 수많은 백내장 환자들의 고마움을 담아 기사작위를 수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