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성진 교수의 눈 이야기 -107

작성일 2014-03-20 첨부파일


환자와 친해지기 프로젝트 - 1. 전화번호 주기

“환자와 친하기가 어렵다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 하고 제가 묻자 “물론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어야겠지.” 친구가 말합니다. “치료나 수술이 잘 되었다는 조건 말이야. 아무리 친해지려고 해도 치료나 수술 결과가 좋지 않다면 그 관계는 깨지게 되어있거든.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좋은 결과와 발을 맞출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런데 과연 이 조건이 필수 조건일까요?
그 친구가 계속 얘기합니다. “환자와 친해지는 것은 피곤을 자초하는 거잖아. 아무래도 조금 더 신경을 써 줘야 하고, 연락처라도 주면 사생활이 침범당할 수도 있으니까. 까다로운 환자를 만나면 정말 힘들어진다고. 수술 결과가 나쁘다면 더욱 더 문제란 말이야.”

5년 전에 만든 제 명함에는 핸드폰이 적혀있는 것과 없는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핸드폰이 있는 명함은 환자들에게 주지 않았지요. 친구의 조언대로 피곤해지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6개월 전부터 조금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환자에게 핸드폰이 있는 명함을 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었지요. 정말 힘들어질까 하는 호기가 있었습니다만 요즘 40대 후반을 들어서니 인간관계에 대한 실험정신이 기어 나온 탓도 있었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면 연락주세요.” 딱 6개월만 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언제부턴가 환자들에게 하는 저의 모든 말과 행동이 전국에 중계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조금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별로 이상한 게 아닙니다. 10년 전 ‘이성진의 망막이야기(www.retina.co.kr)’라는 홈페이지를 만들고, 제게 수술을 받았던 지방 환자들에게 궁금한 점이 있으면 오시라며 소통의 장을 열었을 때만 해도 그런 느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2,000명 이상의 환자들이 홈페이지에서 상담을 하게 되었고, 2년 전부터는 ‘황반변성을 극복하는 사람들’이라는 네이버 카페에서 환자들의 궁금한 질문에 답변을 해 주기 시작하자 이제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의 진료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중계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혹자는 설마 이 작은 3평의 진료실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러운 진료내용이 어떻게 오픈될 수 있는가 의심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환자들은 자신이 겪은 모든 이야기들을 제한된 공간이지만 같은 질환을 가진 사람들에게 오픈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죠. 거기에는 자신들의 주치의에 대한 평가도 있었습니다.

사실 황반변성 환자들의 상담을 2년 이상을 담당하다 보니 몇 가지 느낀 점들이 있었습니다. 환자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의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과 조금 다르다는 점, 증세의 변화 보다는 증상의 변화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는 점, 의외로 질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의사들에게서 잘 얻지 못하며 이것을 가장 불만스러워 한다는 점, 그리고 수술 후에 일어나는 많은 변화들이 환자들을 걱정스럽게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도 환자들에게 핸드폰 번호를 주는 것은 모험이었지요. 물론 수술 환자들에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만 그렇게 한 것은 다른 망막의사보다 세상과 일찍 조우했던 터라 조금은 ‘소셜’해진 생각을 갖게 되었고, 어차피 답변을 아무 때나 시간이 날 때마다 달 던 터라 환자가 직접 아무 때나 전화를 하면 어떠랴 하는 조금은 ‘느긋’해진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6개월 정도를 실험하면서 느낀 점은 매우 놀라웠습니다. 환자들은 의사가 핸드폰 번호를 받으면 안심을 한다는 점, 불편을 호소하던 모습이지만 그 속에 호의가 느껴지는 점, 그리고 아무도 8시 이후에는 전화를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주말에 전화가 온 것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라는 점입니다.

저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젠부턴가 모든 망막환자들이 내 팬들 같아 보여. 나를 찾아오건 찾아오지 않건, 내게 도움을 청하건 청하지 않건 말이지. 망막의사인 내가 그 팬들 없으면 무슨 존재 가치가 있겠어. 그래서 말인데, 처음 본 환자라도 마치 먼 곳에서 달려온 팬을 대하듯 하게 돼. 그렇다면 전화번호를 주는 것은 좋은 팬 서비스에 해당하지. 이 분들은 스토커처럼 나를 힘들게 하지도 않고, 오히려 존중해 주시지.” “어디 아픈 것 아니지? 그 실험 언제까지 할 건데?” “내가 세상이 싫어지거나 지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