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성진 교수의 눈 이야기 -111

작성일 2014-04-24 첨부파일


환자와 친해지기 프로젝트 - 5. 기억하기

관심이 있는 이성을 만나면 평소에 찾아볼 수 없었던 용기가 생깁니다. 한 마디 말도 잘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마음속으로부터 갑자기 튀어나오는 어떤 말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해 버릴 만큼이요. "저 이번 역에서 내려요." 이 무슨 뚱딴지같은 대사인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광고카피에 사용된 이 상황은 그리 멀지 않은 우리 젊은 날을 떠올리기에 충분합니다.

그 날의 대사는 이랬습니다. "저... 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세상에 이처럼 촌스러운 질문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방 역시 이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노란색이요. 신뢰와 평화를 의미한대요." 라고 답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후에 "그럼 그쪽은 무슨 색을 좋아하시는데요?" 라고 묻습니다. 마치 '하우아유. 아임파인. 앤드유.' 하는 공식처럼 말입니다. 그럼 평소에 꼼꼼히 준비했던 대답을 합니다. "보라색이요. 비밀과 신비함을 뜻하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상대방이 좋아했던 색을 그 이후 만남에서도 기억해주는 것이지요.
노란 꽃잎을 붙인 짧은 편지를 쓴다거나 노란색 꽃이 피어있는 공원을 데리고 간다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아, 이 사람이 내게 관심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식이지요.

이 우스꽝스러운 질문과 답변 속에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마음을 읽는다는 것을 요즘 청년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순수했던 시절의 한 토막 추억입니다. 분명한 것은 질문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답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관심입니다. 관심은 우정의 시작이며, 사랑의 씨앗입입니다.

환자들 중에도 왠지 정이 가는 분이 있습니다. 의사들은 이런 감정을 숨기는데 익숙합니다. 처음엔 시간이 없어서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이제는 시간이 좀 있어도 감정을 표현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감정을 숨기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환자와 친해질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거든요. 아주 간단합니다. 간단한 질문들 하는 것이죠. "댁이 어딘가요?" "영주에요. 애들 집에 놀러왔다가..." "아. 영주군요. 좋은 곳이죠. 사과도 맛있구요." 그 다음 영주를 기억하면 됩니다.

"사실 예전에는 이름도 잘 기억하고 심지어는 전화번호도 수십 개 외웠는데 지금은 딸 전화번호도 잘 모릅니다.

아내 전화번호만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요. 제 머리 속의 기억장치가 스마트 폰 속으로 옮겨간 지 오랩니다." 하시면서 기억이 어둡기 때문에 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시겠죠.

그런데 그렇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환자 차트 한 구석에 영주라고 써 놓으면 되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음에 오실 때 "영주에서 언제 올라오셨어요?" 하시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정이 가는 그 분에 대해 조금씩 더 많이 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아들 하나에 딸 둘이고, 딸 하나는 화가인데 프랑스에서 살고, 환자분은 서예가인데 요즘 눈이 침침해서 쉬고 있고... 사실 이런 걸 다 몰라도 됩니다. 다만 이 환자는 정이 가는 분이라서 관심을 보였고 그 관심의 실타래를 놓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왜 환자와 친해지려고 하는지 또 물으신다면, 저는 부모님이 생각나서 그렇습니다. 형제나 자녀들이 생각날 때도 있구요. 타향에 살고 있는 내 부모나 그저 옆 동네에 살고 있는 형제나 자녀가 생각나니까요. 가족들이 아플 때 어떤 의사가 친절하게 해 주었다면 저는 지금 제가 환자에게 친해지려는 마음에 대한 복을 받은 셈입니다.

의사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강아지가 나를 기억해줘도 고마운데 하물며 내 의사가 기억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병이 저절로 나을 것 같습니다. 세상 곳곳에 있는 조용한 작은 방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저 의사가 관심어린 한 단어를 기억해 줌으로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