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성진 교수의 눈 이야기 -114

작성일 2014-05-15 첨부파일


이별과 마주할 때 - 1

한 번은 환자의 가족 두 분이 제 진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낯이 익어서 반갑게 인사를 드렸는데, 두 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제게 “선생님. 제가 환자 김지숙(가명)씨의 딸입니다. 혹시 기억을 하시는지요.” 어렴풋한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다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가 지난번에 황반변성으로 주사를 두 번 맞았습니다. 시력을 잃을까봐 굉장히 걱정하셨던 분입니다.” 이제 누군지 명확해졌습니다. 왠지 제가 무슨 잘못을 해서 나쁜 일이 생긴 것 같아 가슴이 쿵쾅거렸습니다.

그 환자분은 4개월 전에 사물이 휘어져 보인다고 하며 오셨습니다. 작은 얼굴에 60대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습니다.

검사를 해 보니 망막에 작은 흰 찌꺼기(드루젠, drusen)들이 많았습니다. 이 찌꺼기들 중 일부가 사물의 초점이 맺히는 망막의 중심점(황반)에 침범하였습니다. 망막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이 찌꺼기들은 망막의 아래쪽 혈관(맥락막)으로부터 오는 산소공급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황반에 산소가 부족해지자 황반을 살리기 위해 맥락막에서 새로운 혈관(맥락막신생혈관)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혈관들은 구조가 매우 약해서 쉽게 터지는데, 이 환자분도 결국 작은 출혈이 망막의 중심부를 가리게 되었지요. 신생혈관이 동반된 습성황반변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신생혈관들은 눈 속 항체주사에 잘 제거가 되는 편입니다. 게다가 작은 출혈은 쉽게 흡수가 되는 편이고, 시력도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환자분은 갑자기 두려워졌습니다. 내 두 눈이 모두 흐려질 까봐 밤잠을 설쳤습니다. 가까운 안과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미국과 유럽의 실명 1위 질환인 황반변성이 생겼다고 하면서 치료되기가 어렵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또 다른 안과에서는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달 비싼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은 더 커졌고, 불면증도 심해져서 우울증까지 생겼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희망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설령 언젠가 실명이 된다고 해도 그 때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불면증이나 우울증이 지속되면 황반변성이 좋아질 리 만무합니다. 일상적인 식생활에서 황반변성을 예방 또는 회복시킬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있는데, 이 부분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휴식이 없이는 질병이 좋아질 수 없습니다.

저는 힘을 합쳐서 치료를 꾸준히 잘 해 보자고, 그렇게 하면 실명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몇 번이고 확인을 하시더니 조금 안심된다며 신생혈관을 제거하는 눈 속 항체주사를 맞겠다고 했습니다.

주사를 맞은 후 2주 째 검사에서 출혈로 인한 황반부종이 많이 감소했습니다. 저도 한 달 간격으로 주사를 3번 맞게 되면 시력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환자는 몇 번이고 제 답변을 확인하면서 불안감을 씻었습니다. 2번 째 주사에 황반부종은 더 많이 감소했습니다. 그래서 3번 째 주사를 예약해 드렸지요.

그런데 주사 날에 그 환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집으로 전화를 드려보았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냥 다른 경우처럼 몸이 안 좋거나 다른 병 때문에 못 오셨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2개월 후에 이 가족 두 분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엄마가... 집에서... 목을... 매셨어요. 저희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두신 후였구요.” 2번째 주사를 맞고 좋아졌는데도 그만 우울증이 환자를 데리고 가 버린 것이지요. 갑자기 할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환자의 다급한 목소리와 희망을 잡고 싶어 하던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몇 번이고 다짐을 받으려는 듯 제 눈을 바라보면서 ‘확실히 실명되는 것은 아니죠.’ 하시던 모습 말입니다. 갑자기 저도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두 분도 눈물이 맺힌 눈으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벌써 2달 전에 엄마를 보내드리고 지금은 마음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엄마에게 계속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신 선생님이 생각났어요. 꼭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아... 정말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