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성진 교수의 눈 이야기 -123

작성일 2014-08-14 첨부파일


응급실의 추억

안과 전공의로 첫 발을 내딛었던 병원은 순천향대학천안병원이었습니다. 당시 천안병원은 대전지역을 제외한 충청남도 서북부에서 유일한 대학병원이었습니다. 병원 옆으로 충남 서북부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국도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교통사고 환자들로 응급실을 북적거렸습니다. 당연히 눈을 다친 환자들도 많아서 20명의 입원환자를 기록할 수 있는 칠판이 꽉 차고 넘친 적이 많았습니다.

전공의 숙소는 별관 건물 꼭대기였고, 응급실은 신관 건물 1층에 있었습니다. 응급실까지 가려면 긴 본관을 지나야 했지요. 밤에 응급환자 콜이 오면 “네. 안과 1년차 이성진인데요, 환자 안과 외래로 올려주세요. 바로 가겠습니다.” 하고는 2층 침대에서 잠에서 깨고 싶지 않은 반쯤 감긴 눈꺼풀로 침대의 간이 계단을 더듬거리며 내려갔습니다. 침대가 흔들거리면 아래층 침대의 선배 의사가 깨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요. 숙소와 응급실 사이에 있는 긴 본관 건물을 지나 건물들 사이에 있는 긴 외부 연결 복도를 걷다보면 몸 구석구석에 박혀있던 잠방울들이 터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차갑고 맑은 공기가 코를 지나 폐에 들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정신은 조금씩 맑아집니다.

마취성분이 들어있는 마법의 안약을 눈에 한 방울 넣어주면 아파서 눈을 못 뜨고 눈물을 줄줄 흘리던 환자는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아. (지금 새벽 1신데) 눈에 본드가 들어갔네요. 빼 드릴테니 눈을 움직이지 마세요.” 면봉으로 각막에 꼭 파묻혀있던 본드를 제거하고, 찰과상이 생긴 눈에 연고를 넣은 후 압박안대를 해 줍니다. “어. 안 아프테요. 감사합니다.” “지금은 그렇지만 10분 지나면 마취가 풀려서 다시 아플 거에요. 그래도 오늘 밤은 견딜 수 있을 겁니다. 내일 상처가 잘 아물었는지 확인해야 하니 외래로 다시 오세요.”

그 때 다시 응급실 인턴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아래 눈꺼풀이 좀 찢어진 환자가 있는데, 봉합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형외과 선생님이 계신데 밀려서요.” 알았다고 말하며 내려가자 50대 남자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다시셨나요?” “오늘 산에 갔다가...” “어디에 찔렸나요?” “그게 아니라, 총이 오발되면서 스친 것 같아요.” “총기사고에요?”

인턴 선생에게 신경외과를 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자 “신경외과에서 조금 전에 보고 가셨어요. 신경증상이 전혀 없으니 성형외과 선생님에게 봉합해 달라고 했는데, 밀려서요. 죄송합니다.” “괜찮아. 눈꺼풀 열상은 안과에서 보는 게 좋아. 눈도 확인할 겸. 그런데 X-ray 나오면 보여줘.” 거기에 있던 불쌍한 성형외과 의사는 의대생 때 실험 단짝이었던 친구였습니다. “헤이, 동은아. 수고가 많다.” 그 친구는 거의 매일 밤새도록 교통사고 환자 봉합하는 게 일입니다. 성형외과 안 하길 잘했지. 나도 옆 침대에 자리를 잡고 봉합을 시작했습니다.

“Skull AP에서 뒤통수 쪽 뼈에 뭔가 흰 점이 하나 보이는데... 총알은 아니겠지? 그래도 신경외과에 빨리 노티 해.” 전화를 건 인턴선생이 쩔쩔 매는 것을 보니 아까 외래로 오면 된다고 하지 않았냐는 호통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내가 전화를 바꿔달라고 해서 “선생님. 안과 1년차 이성진인데요, 눈꺼풀 상처가 좀 깊은 것 같아서요. 혹시 총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후 신경외과 선배님이 오시더니 일단 경과를 보자고 설명하며 입원장을 내셨습니다. 환자는 아무 문제없으니 집에 가겠다고 우겼습니다. 집이 머니까 빨리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뇌 CT 찍을 돈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입원을 일단 하신 후에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검사를 하자고 간신히 설득했습니다. 인턴 선생이 고맙다고 하고, 나는 계속 수가하라고 했습니다. 2시간이 이렇게 쑥 지나갔습니다. 머리도 상쾌해졌습니다. 다시 긴 복도를 따라 침대까지 올라가면 잠이 금방 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서 안과 회진준비를 하러 내려갔습니다. 어제 응급실 환자를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김봉철 과장님이 “아. 그 환자가 그 환자였군.” 하십니다. 그 환자가 입원하러 올라가던 중 갑자기 발걸음이 휘청거리자 응급검사를 하고 바로 수술실로 갔다고 합니다. 본인의 총기 오발사고로 작은 총알 파편이 아래 눈꺼풀을 뚫고 뇌를 관통한 후 반대편 두개골에 박힌 것입니다.

다행히(?) 눈 손상은 없었고, 그 환자의 생명도 무사했습니다. 갑자기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환자가 우긴다고 그냥 집에 보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환자가 아무리 우겨도 의사가 이겨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정말 중요한 점은 놓치지 않도록 배우고 또 배웁니다.